너는 내가 처음 봤던 눈동자야

 
사람들은 NO-MAD가 성공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부정하고 싶음과 동시에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매 활동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바뀌는 콘셉트는 대중이 그들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없었던 수 많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들의 소속사는 그들을 어떻게 해야 더 반짝거리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별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대중은 그 누구보다도 기민한 집단이다. 그들은 늘 다른 방식으로 반짝이는 '새로운' 사람들을 원했다. 강렬하게 번쩍이는 혜성같은 사람에게 열광하기도 했으며, 마치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이 깡마른 몸을 이끌고 토해내듯 노래를 부르는 아이를 동경하기도 했으며, 사람들의 어줍잖은 관심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고하고 유유하게 춤을 추는 여자에게 열망하기도 했다. 대중은 그 누구보다도 기민한 집단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들의 취향, 입맛, 관심, 호기심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 한숨, 기쁨, 기대가 한 겹씩 더해지고 기워져서 빚어진 아이돌만이 무대 위에서 환호를 받을 수 있다.
무대 위에 달린 형형색색의 조명이 어떤 각도로, 어떤 시점에, 어떤 길이로, 어떤 흐름으로 켜져야 할 지 계산해야 했다. 수많은 셈 끝에 비춰진 조명이 아이돌의 얼굴 위에 계산된 대로 잘 쏟아지고 있는지 무대 뒤의 사람들은 확인하고 안도한다. 그리고 무대 너머의 사람들은 그 순간 그에게 내리쬐고 있는 빛이, 이 우연이 너무 아름답다고 환호하며 박수를 친다. 
NO-MAD는, 토우마는, 그런 계산 없이 홀로 무대 위로 내쳐진 아이들이었다. 
 
그녀는 늘 그의 목소리와 함께 잠에서 일어나곤 했다. 보통 사람들은 아침 알람 노래를 좋아하지 않거나, 아니면 좋아할 일이 없는 노래를 설정하곤 한다. 반강제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기상 알람은 대부분에게 달갑지 않은 일이다. 늘 똑같은 노래와 함께 피곤한 아침을 맞이하다보면, 기상이라는 행위 자체를 싫어하기보다는 그 시간을 알려주는 노래를 기피하게 된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아침 알람을 다른 사람의 노래라거나, 가사가 없는 일반 벨소리로 바꿀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건 그녀가 늘 아침을 시작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느릿느릿하게 침대를 빠져나와 식빵 두 개를 토스트기에 넣어두고, 냉장고에서 유통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딸기 잼을 꺼낸 다음. 빵이 다 구워지기 전까지 옷장 앞에서 오늘은 무슨 옷을 입어야할까 고민한다. 늘 똑같은 청바지와 품이 많이 큰 남방을 꺼내 의자에 걸어두고 나면, 다 구워진 빵 위에 잼을 발라 먹는다. 그리고는 욕실에 들어가 후다닥 씻고 나와 침대에 다시 기어들어가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냥 모든 것을 다 던져 버리고 이불 사이에 기어 들어가 조금만 더 잠을 잘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얼굴 위에 수분크림을 넓게 펴바른다. 그 위에 자외선 차단제를 덧바르기 위해 푸른색 용기를 들어올리면, 그 안에서는 공허한 무게만이 느껴진다. 
아, 벌써······ 산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촘촘하게 짜여 있는 게으른 일정 사이에 불청객 하나가 끼어든다. 그녀는 다 쓴 자외선 차단제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시간의 흐름은 야속하다. 어쩐지 눈가에 다크서클이 짙어진 것 같기도 하다. 요즘 많이 피곤했나? 아니, 그냥 미백 효과가 있는 자외선 차단제를 못 발라서 그런거겠지. 그녀는 거울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가 미소를 지었다가도 해본다. 우울해보이는 얼굴은 여전하다. 그렇지만 괜찮아,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집에 들어오기 전 편의점에서 맥주를 한 캔 사와야지. 텔레비전으로는 녹화해두었던 주말 연속극을 틀어놔야지, 그리고 조금 남겨두었던 토마토 위에 설탕을 뿌려먹자. 드라마를 다 본 다음에는 창문을 열어두고 새벽 바람을 맞으며 밀려들어오는 주말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집 옆 골목에 비스듬히 세워둔 은백색 자전거 위에 올라탄다.  이어폰에서는 전 날 그가 녹화한 라디오 속 노랫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다. 당신에게 받은 멋진 메세지를 소개해드립니다! 그러면 먼저, 한 곡 들어주세요. 원더풀 옥타브... ♪...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힘이 담겨 있다.
그녀는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뺨을 스쳐가는 바람 속에는 곧 다가올 여름이 온전하게 담겨 있다. 
 
 

너는

내가 

처음 봤던

눈동자야  

 
회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사람이 움츠러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드높은 빌딩들이 꽉꽉 채워진 길거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바람을 만끽하며 달려온 거리들이 그리워졌다. 바람은 어느 새 멎어 있다. 횡단보도 앞 거리는 번잡스러웠고, 나는 마침내 다다른 방송국 앞에서 숨을 한 번 고른 뒤 앞으로 나아간다. 
방송국 뒤편에는 소박하게 꾸려진 자전거 주차장이 있다. 건물의 규모에 비해서는 아주 명백하게 작은 크기지만, 나는 그 곳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크지 않은 곳에 그렇게 자전거를 가져다가 대고 나오면 무언가의 형태가 없는 성취를 이뤄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출석 도장 같은 것, 일기장에도 채 한줄이 되지 못할 소박한 크기의 성취감이지만. 그래도 도시 속 고층 건물 뒤에 작게 내어져 있는 고즈넉한 공간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자전거에 자물쇠를 잠그고 나오자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꼭 메아리처럼,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는데, 잘못 들었나?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손을 흔들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긴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서 다가와 내게 말을 건넨다. 그의 숨에는 지친 기색도 없다.
 
"히라이 씨!"
"아, 안녕하세요·····!"
그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의 눈동자가 자주 반짝이고 있었기에 나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걸 수도 있다. 
"아, 미안. 너무 갑자기 달려왔지."
"아니에요. 그냥, 깜짝 놀라서요."
"하핫,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을 걸어 버렸어. 미안."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그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 확실히 느껴진다.
"반가웠거든. 저기서 걸어오고 있는 히라이 씨가 보이길래."
"저요?"
"응."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저기, 저 멀리서부터?"
"음, 응? 보였으니까."
한참 되는 거리였는데 어떻게 나를 알아봤다는 이야기일까? 그는 여전히 알쏭달쏭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민에 빠져 있자 그가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머리카락 말이야."
"아······?"
그렇지만 내 머리카락 색은 특색도 없는 평범한 색이 아닌가? 도쿄에는 이런 머리를 하고 있는 여성들이 넘쳐난다. 이 방송국에도, 지금 당장 빌딩을 향해 걸어가는 저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도 찾으라면 충분히 찾을 수 있는 정도의 스타일이다. 나는 의아함을 느낀다.
“그냥 보였거든. 그냥 걸어가고 있는데, 히라이 씨가 보였어. 그냥 그 뿐이야." 
그는 계속해서 뒤에 변명을 이어 붙였다. 궁금하긴 했지만 이유를 듣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채근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꼭 나를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처럼 소중하게 굴곤 했다.
나는 그의 섬세한 배려가 다정하다고 느끼면서도 부끄러워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배려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아마도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대해주고 있겠지. 나는 그가 주는 달콤한 배려에 취해 주제 넘는 착각을 하지 않기 위해 늘 애를 써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지 않고 있으면 그가 꼭 내게만 잘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았다. 나는 결말이 슬프게 맺어지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꽉 닫힌 해피 엔딩이 아닌 이야기는 궁금하지 않다. 나는 그 기준을 내 삶 속에도 적용시켰다. 나는 그냥 그의 오래된 팬이고, 운이 좋아 일터에서 그를 마주하게 되었으며, 그는 오래된 팬에게 해줄 수 있는 호의를 베풀어주고 있는 것 뿐이다. 늘 머릿속에 상기시켜야 하는 문장이다.  
나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는 그는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인다. 문득 그의 눈가에 짙은 색 섀도우가 칠해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 방금 메이크업을 막 받고 나온 걸까. 조용하게 뻗어 있는 속눈썹 뒤에 있는 눈동자에는 빛이 들어 있다.
"고마워요, 이누마루 씨." 
그럼, 가볼게요.
나는 그가 더 무슨 말을 하기 전에 그 자리를 떠나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는 내 뒤에 서서 무어라 말을 더 걸려고 했던 것 같았지만, 그 뒤로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나는 얼마 남지 않은 녹화 시작 시간에 맞추어 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건물 속으로 사라진 뒤에도 계속해서 그 출입구를 바라보기 위해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저 멀리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서야 네! 하고 큰 소리로 외친 다음, 그 방향으로 힘주어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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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매몰된 배우, 코미디언, 가수들이 나와 최근의 근황을 이야기하자는 호기로운 기획으로 시작된 예능은 예민한 배우 한 명의 히스테리로 인해 잠시 녹화가 중단된다. 
 
"아니, 그게 말이 되니? 웃겨서 원. 여기 모인 사람들은 무슨 다 시간이 남아돌아서 모인 줄 아나 봐. 자기만 처절하고, 자기만 불쌍하고. 자기만 세상 불행하고. 응? 머릿속에 자기 밖에 안 들어 있는 거야. 그런 애는. 자기만 그런 줄 안다고, 자기 인생이 너무 불쌍해서, 막 견딜 수가 없는 거야. 그러니까 남의 일은 하잘 것 없어 보이는 거라고. 그러니까 그렇게 안하무인처럼 구는거지. 안 그래요?"
"정말 죄송합니다······." 
"작가님이 뭘 죄송해요? 죄송할 건 그 년이지."
"아, 아닙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곧바로 녹화 재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다음 녹화에 지장이 가게 되는 건 아닐지······."
"됐어요, 작가님한테 괜히 짜증 내고 싶지 않아요. 작가님 탓도 아닌데."
"넵······."
"어서 가봐요. 바쁘지 않아? 나 말고 다른 애들은 짜증 많이 났을걸." 
"알겠습니다. 제가 빨리 다시 올게요.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손을 두 어번 흔들었다. 나는 그녀의 대기실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복도에 털썩 주저 앉았다. 오늘 녹화가 순탄치 않을 거라는 예상은 했다. 하지만 녹화 중 갑자기 게스트끼리 시비가 붙어 버리는 방향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오늘 내게 찾아온 작은 고난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 지 막막하기만 했다.
불륜 스캔들로 인해 잘 방영 되고 있던 간판 드라마 주역 배우 자리를 빼앗긴 여배우A씨와, 적당한 인기의 걸그룹 메인 보컬로 데뷔하였다가 금방 해체, 그리고 별 볼 일 없는 예능을 전전하다, 마침내 다다르게 된 드라마(하필, 그 드라마는 여배우A씨의 스캔들로 인해 시청률이 급감하고 만다.)가 폭삭 망해버려, 결국은 시청률이 잘 나오지 않는 아침 시간대 예능 구석 자리게스트를 전전하고 있는 B씨.
B씨는 자신이 힘들게 얻은 배역을 A씨가 완전히 망쳐버렸다고 생각했으며, A씨는 별 잘나지도 않은 B씨가 저를 무시하려 드는 것이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그 둘이 서로를 좋아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을 머릿속에 양지하고 있었고, 세트를 관리하는 스탭에게 "이 둘은 꼭 자리를 멀리 떨어트려 놔주세요" 라는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처음부터 둘을 같이 캐스팅하지 않았으면 됐을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 둘을 같은 예능에 굳이 캐스팅한 것은 프로그램의 지휘를 맡은 총 프로듀서의 뜻이었다. '둘이 해 봤자 얼마나 치고 박고 싸우겠냐? 적당히 기싸움 하고 노는 거, 사람들은 그걸 더 재밌어 한다고.' 라는 말 하나에 여기까지 왔다. 나는 이제 다음 대기실로 향해 또 다른 게스트에게 고개를 숙이며 녹화 지연에 대한 사유, 그리고 진심이 섞인 사과를 해야 했다. 앞으로 5명. 5명에게 진심이 섞인 사과라는 거, 할 수 있을까······.
사실 그렇게까지 진심으로 죄송하진 않다. 죄송할 건 굳이 따지자면 내가 아니라 B씨지. 하지만 이 상황이 벌어진 이상 사과를 하며 모두에게 허리를 굽혀야 하는 건 나였다. 나는 있지도 않은 진심을 짜내며 남은 5명에게 싹싹 빌어야 했다. 
B씨는 '지금 저 막돼먹은 년하고는 같이 방송 못 하겠다!'고 소리를 지르며 세트장을 뛰쳐 나갔고, 지금은 아마도 마스카라가 섞인 검은색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을 터였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곧바로 딸려 보냈기에, 지금은 좀 온전한 상태의 얼굴이 됐을지도. 제발 그랬으면 좋을텐데.
다음 대기실로 향하기 위해 한숨을 푹푹 쉬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또 다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엇."
나를 마주하자마자 웃고 있던 얼굴이 금방 흐려진다. 그는 금세 내 기분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 얼굴이 그렇게 심각해 보이나?
"히라이 씨, 무슨 일 있어?"
"아, 음. 아니예요."
"으음······ 표정이 좋지 않아 보여서 그래. 괜찮은거야?"
"아, 그런가요. 음. 사실 좀 피곤해서 그렇게 보이나봐요." 
그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이다. 
"무슨 일 있는거지?"
"아, 아니에요. 그냥, 어제 잠을 잘 못 잤어요. 좀 바보 같죠."

사실 어제 잠은 실컷 잘 잤다. 나는 그냥 그의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부끄러웠을 뿐이다. 그와 말이 길어질수록 내 속내를 다 들키게 될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그가 빨리 길을 비켜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여전히 복도 한 가운데 서 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의 얼굴은 꼭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는 거라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는 일일지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지금 내게 발생한 고난은 그가 도와줄 수 없는 종류의 일이다. 녹화에 전혀 관련 없는 그에게까지 모든 상황을 설명해주기에는, 오늘의 나는 너무 피곤하다. 
"마음은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정말 괜찮아요."
"아, 알겠어······."

나는 그가 서 있는 자리를 피해서 걸어가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그 때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온다.
"힘든 일이 있다면 말해줘. 도와줄 수 있는 건······."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발걸음을 더 내딛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춘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말을 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힌다. 그는여전히 나를 올곧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심장이 덜컹거리는 감각에 나는 그를 오래 마주보지 못하고 땅바닥에 시선을 쳐박았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어 붙인다.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서 그랬어. 주제 넘었다면, 미안."
그는 이상하다. 어째서 나에게 저런 말을 하는 거지? 나는 그에게 결국 남인데, 나는 그가 이렇게까지 정도 이상의 호의를 베풀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예상하지 못한 범위의 선의는 때때로 사람을 당황시키기도 한다. 나는 잠시 멍해진다.
"이누마루 씨,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어, 그러니까. 그냥, 도와주고 싶었어. 그 뿐이라고!"
그가 입을 삐죽이는 모습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자 그가 나를 흘깃 쳐다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히라이 씨."
"네?"
"오늘 말이야, 어. 녹화가 다 끝나고 나서······."
그가 답지 않게 망설이는 모습에 나는 속으로 침을 꿀꺽 삼킨다. 
"뭐라도 먹으러 가지 않을래······."

그는 말 끝을 흐리며 망설임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순간 깨달았다. 나는 그가 확신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래요." 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금요일 밤, 모든 것을 다 내려두고 적적하고 고요한 클래식과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을 포기하고 저녁시간을 내어준다는 것은-다른 사람들은 몰라도-내게는 아주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그와 함께 오코노미야키같은 것을 주워 먹으며 적당히 할 만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같은 것도······ 나와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고 나서 ‘아, 즐거웠다.’ 같은 감상을 느끼게 할 자신도 없다······. 하지만, 그가 꼭 속상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을 아랑곳 않고 휙 떠나버릴 수 있을 만큼 무딘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것도, 그는 내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적어도 그는 내게 정말 소중하고 특별한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는 어떤 존재일지는 모르겠지만.  

"바쁘다면 어쩔 수 없지만······. 뭐?"
"저는 좋아요, 그보다. 제 일이 너무 늦게 끝나버릴 수도 있는데요······. 기다리게 하는 건 싫어요. 촬영이 끝나는 그 시간까지 안 계실 수도 있고." 
"남아 있어!"
"예? 제, 제가 언제까지 있을 줄 알고······."
"음, 흠. 하핫······."
그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 상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아마 지금부터, 음. 몇 시간 더 걸릴 것 같기도 한데요." 
"상관 없어."
"스케줄은요?"
"아~이! 괜찮다니까."
아이돌이면서, 정말로 괜찮은건가요? 라는 말이 목 끝에서 멈춘다. 그는 정말로 기분이 좋아보인다.
“아키… 앗."
"네?"
"음, 히라이 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마음 속으로는 나를 종종 이름으로 부르곤 하는 걸까? 그가 나와 비슷한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그를 자꾸 토우마, 라고 친근한 사람처럼 불러버릴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와 이렇게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 보고 지낸 시간보다는  그를 멀리서 바라봐온 시간이 훨 더 길었기 때문이다. 
”있지, 끝나고 나서 연락 주지 않을래? 바로 올테니까.“ 그가 다소 높아진 목소리로 말한다.
”알겠어요.”
"래빗챗으로 바로 연락 줘야 돼!" 
"네, 꼭 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그는 만족한 얼굴로 사라진다. 마지막까지 내게 손을 흔들고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는 그가 복도 모퉁이 끝으로 돌아 사라질 때까지 그에게 계속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가 떠나자 텅 빈 복도는 금방 조용해진다. 원래 이렇게까지 조용했던 곳이던가?

 
그의 에너지에 감명받은 나는 남아 있던 출연자들에게 열심히 고개를 숙이며 설득시키는 것에 성공하였으며, 수정 화장이 전부 마무리 된 B씨도 다시 세트장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A씨는 여전히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뾰루퉁한 표정으로 세트장 내 가장 높은 좌석에서 다리를 꼰 채로 얌전히 앉아 있었다.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잡아먹으면서까지 으름장을 놓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기나긴 녹화 중단 사태에 다들 지친 모양이다. 녹화를 갓 시작했을 때처럼 말 사이사이에 끼어 있던 가시는 커녕, 잔뜩 너그러워진 분위기에 나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촬영장 가장 맨 구석에 서서 그들이 별 것 아닌 이야기를 우스꽝스럽게 꾸며내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아까 전 그가 내게 지어주었던 표정을 다시 떠올린다. 그는 분명히 나를 보며 계속 웃고 있었다. 꼭 나를 소중한 사람처럼 느끼고 있다는 것처럼. 내가 생각했지만 정말 가능성 없는 이야기네. 나는 이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작게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유행이 지나 잘 팔리지 않는 로맨스 소설 같은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이런 생각을 계속 하게 되는 건 아무래도 그와 함께 있는 시간들이 너무 즐거워서 그랬던 거겠지. 그래서 계속 이렇게 꿈같은 생각들을 하며 되도 않는 욕심을 내게 되는 걸까?
그는 정말로 내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 하나이기도 하고.
연예인이 너희들에게 웃어주는 것은 버릇이야, 우리에게 친절하게 굴어주는 건, 그냥 "일"을 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인거라구. 제발 이상한 착각 하지 말고 우리 일에나 집중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해야 더 반짝거리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야 되는 사람들이야. 그들이 내뿜고 있는 빛에 꼬여 홀딱 타버리는 날벌레가 되어서는 안 돼. 그건 너무 꼴사납지 않니? 애초에 너를 위해 반짝이고 있던 빛이 아니야. 명심해. 
방송국에 처음 들어오게 되었을 즈음 사수에게서 들었던 말이다. 나는 그의 말이 잔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사회 초년생에게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현실을 말해준다는 것은 꽤나 귀찮은 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다정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때의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내게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자만하곤 했다. 그렇지만 결국 나도 비슷한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구나…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그가 온전히 나만을 비추기 위해 떠오른 태양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것이 나와 그들의 유일한 차이점일지도 모른다. 
 
그 후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